[김동철칼럼] 부정부패와 김영란법
[김동철칼럼] 부정부패와 김영란법
  • 김동철
  • 승인 2016.11.1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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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

 

세계경제포럼(WEF)이 최근 세계경쟁력보고서에서 밝힌 우리나라 부패지수는 OECD 중 9위로 나타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가장 부패정도가 심한 국가 11개국이 선정됐는데 가장 부패한 국가는 멕시코였다. 그리스는 5위, 헝가리 4위, 이탈리아 3위, 슬로바키아 2위였다.

9위에 오른 한국에 대해 “부패가 큰 문제인 것으로 광범위하게 여겨지고 있다”면서 “최근에는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 언론인, 교사 등에게 3만원 넘는 밥을 사주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률을 도입했다”며 김영란법을 소개했다. 2004년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 대법관으로 발탁된 그는 국민권익위원장(2011년 1월~2012년 11월) 때인 2012년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을 발의했다.

‘벤츠 여검사’ 사건을 계기로 공직자의 대가성 없는 금품수수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할 때였다. ‘뇌물공화국’이라는 오명을 가진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른바 ‘3·5·10 규칙’, 즉 직무관련이 있는 사람과의 식사(3만원 이하), 선물(5만원 이하), 경조사비(10만원 이하)에 대한 처벌 규정이 시행된 것이다.

김영란 서강대 석좌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더치페이가 좋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평범한 인간관계에서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돈과 이권이 왔다갔다 하는 이해관계자들은 벌써부터 꼼수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법망을 교묘히 뚫고 나가려는 음험한 시도가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2016년 9월 28일부터 부정 청탁금지법 시행으로 부패 척결의 대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군 이래 부패방지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으로 매우 혁명적 발상이다.

필자가 볼 때 김영란 석좌교수는 이 시대 ‘여자 이순신 장군’과 같다고 생각한다. 원리원칙의 시금석(試金石)으로 추앙받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방산비리 등 뿌리 깊은 공직자의 부정부패, 정치권의 부정청탁, 공무원-공기업의 엽관운동 등으로 비리의 온상이라는 곳을 드디어 도려낼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아무쪼록 부정과 비리가 판치는 이 썩은 사회에 한 줄기 광명의 빛을 발하여 명실상부한 선진국민으로서 자존심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조선시대에도 청탁금지법인 ‘분경(奔競)금지’가 있었다. ‘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벼슬을 얻기 위해 집정자의 집에 분주하게 드나들며 엽관(獵官)운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초기부터 여러 차례 제도적인 조치가 거듭되던 끝에 1470년(성종 1년) 분경의 금지 대상이 확정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이에 따르면 이조와 병조의 제장(諸將)과 당상관(정3품), 이방과 병방의 승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의 집에 동성 8촌 이내, 이성(異姓)-처친(妻親) 6촌 이내, 혼인한 가문, 이웃 사람 등이 아니면서 출입하는 자는 분경자로 간주되어 100대의 곤장을 맞고 3000리 밖으로 유배당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매우 폐쇄적인 법제여서 많은 효과가 없었다. 또한 후에는 관인들이 표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몰래 청탁하고 행적을 감추기 때문에 일일이 적발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후 유명무실해진 법제로 남아 있다가 1688년(숙종 14년)에 분경 금지 시기와 대상이 축소되어 좀 더 합리적으로 되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매관매직, 양반을 사고파는 행위, 탐관오리의 전횡 등으로 나라가 망조(亡兆)가 들어 마침내 일본에게 먹히는 결과가 되었다.

사람의 본성은 본디 호리오해(好利惡害)한 존재이다. 즉 이익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피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이익을 좋아함이 지나쳐 남에게 피해를 끼친 결과, 패가망신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공자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눈 앞에 이익이 보일 때 먼저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했다. 강태공 또한 의승욕즉창 욕승의즉망(義勝欲則昌 欲勝義則亡), “의리가 욕심을 이기면 번창하고 욕심이 의리에 앞서면 망한다”고 말했다.

위료자도 화재어호리 해재어친소인(禍在於好利, 害在於親小人), 즉 “화는 이익을 좋아하는데 있고 피해는 간사한 소인 모리배(謀利輩)를 가까이 하는 데 있다”고 일갈했다.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는 것 같다.

▲ 이순신 장군 동상

 


청렴결백한 원칙주의자 이순신의 공직관을 살펴보자.

1579년 2월 훈련원 봉사(종8품)로 재직 중 인사권을 가진 병조정랑(정5품) 서익이 자신과 친분있는 자를 참군(參軍 종7품)으로 승진시키려고 했으나 부하 이순신에 의해 거절당했다.

“아랫사람을 그 자리에 올리는 것은 의당 승진해야 할 사람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이라는 게 이순신의 말이었다. 머쓱해진 서익은 그 후 1580년 이순신이 발포 수군만호(종4품)로 재직 중일 때 군기경차관으로 내려가서 군기수리 불량이라는 죄목으로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이보다 앞서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 객사 앞마당의 오동나무를 베어서 거문고를 만들려고 사람을 보냈다. 이때 이순신은 직속상관인 좌수사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라의 공물이므로 사사로이 자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즈음 덕수이씨로 같은 문중인 이조판서 율곡 이이가 사간원 대간인 류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이 때 이순신은 “같은 문중(19촌 사이로 이순신이 항렬이 하나 높아 아저씨뻘이었다)으로서 만날 수는 있지만, 인사권을 가진 분을 만날 수는 없다”고 해서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서익의 모함으로 발포만호에서 파직되어 억울함이 많았을 텐데, 이순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한번은 병조판서 김귀영이 그의 서녀를 이순신의 소실로 시집보내고 싶다고 사람을 보냈다. 그때 이순신은 “벼슬길에 갓 나온 내가 어찌 권세있는 집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느냐”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이처럼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시기와 모함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불이익을 받아 함경도 산악지역의 변방으로 쫓겨 다녔다.

장부출세 용즉효사이충(丈夫出世 用則效死以忠)
장부로 태어나 세상에서 나라에 쓰이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불용즉경야족의(不用則耕野足矣)
쓰이지 않는다면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약취미권귀(若取媚權貴)
권세와 부귀에 아첨하여

이절일시지영(以竊一時之榮)
한때 이(권세와 부귀)를 일시적으로 영화를 누리는 것은

오심치지(吾甚恥之)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1576년 2월 32세 때 식년무과에 급제한 뒤 12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발령받기 전 아산 자택에 내려와 있을 때 밝힌 공직관이다. 이순신 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은 여수에 충민사(忠愍祠) 사당을 지은 뒤 충민사기(忠愍祠記)에 이 같은 이순신의 강직한 공직관을 밝혀놓았다.

<김동철 주필 약력>

- 교육학 박사
- 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 성결대 파이데이아 칼리지 겸임교수
- 문화체육관광부 인생멘토 1기 (부모교육, 청소년상담)
- 전 중앙일보 기자, 전 월간중앙 기획위원
- 저서 : ‘이순신이 다시 쓰는 징비록’ ‘무너진 학교’ ‘밥상머리 부모교육’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 김동철 베이비타임즈 주필·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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